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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7 GV Black - professional, 이호준 - 프로는 인내의 삶이다.
- 2019.10.11 자영업자가 본 고용시장에서의 가난요인
- 2008.11.01 개새끼들 - 김규항
- 2008.06.04 [펌] 긁어 부스럼 만든 허정무 감독
- 2007.05.05 중대장들을 해방시켜주자! (from ohmynews)
출처 : https://pgr21.co.kr/freedom/82712
자영업자가 본 고용시장에서의 가난요인
저는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가족끼리 하는 부업이긴 하지만요. 주업으로는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이 현재 가진 자산은 없지만 젊은 나이 + 노동소득이 가져오는 기대소득을 포함하면 극빈층에 떨어질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부자는 못 되겠지만 애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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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가족끼리 하는 부업이긴 하지만요. 주업으로는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이 현재 가진 자산은 없지만 젊은 나이 + 노동소득이 가져오는 기대소득을 포함하면 극빈층에 떨어질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부자는 못 되겠지만 애슐리는 가겠죠. 잘 하면 빕스도 가고.
편의점을 시작하고 나서 사람을 뽑아 쓰면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리고 때로는 가난이 그들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도 많이 보지요. 일하면서 하는건 오로지 불법 토토 사이트라거나, 조금의 성실성도 없는 사람이라거나, 업무지시를 거의 기억하지 않는(못하는건지 않는건지) 사람이라거나, 허구한날 지각하고 결근하고 손님이랑 싸우고.. 지금의 상황에서 조금의 장래성도 기대하기 힘든 사람들. 심지어 돈을 빼돌리거나 소소한 절도를 저지르는 사람들도 써 보고, 그 사람들이 술과 담배값에 얼마 안되는 벌이를 (최저시금+주휴수당 주고 주 40시간 조금 넘게 일하면 그래도 150은 넘깁니다만) 탕진하는 것도 많이 봅니다. 모바일 게임에 월급 받아서 쏟아 부으면서 고시원 사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반대로 얘는 가난을 이겨내겠다, 혹은 앞으로 뭘 해도 열심히 하겠다 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그치만 제 경험상, 이런 일자리에 오는 사람들 중에 '몸과 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정말 소수입니다. 제 생각에 몸과 정신이 건강하다는건 질병이나 보험에 대한 비용부담이 거의 없고, 적당히 식단관리가 되지 않은 인스턴트 음식들과 저가의 탄수화물 중심의 식사를 해도 아직 몸이 탈이 안나고, 일 8~9시간의 노동을 건강한 마음 상태로 '성실히'수행할 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런 사람은 정말 드뭅니다. 설령 그렇게 건강한 사람이 하루만, 일주일만, 한달만, 세달만, 반년, 일년은 유지될 지언정 기간이 지날수록 가장 건강하던 사람도 조금씩 '닳아'갑니다. 게다가, 몸과 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애시당초 최저임금 주변의 일자리에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10대후반 20대 초중반의 아르바이트 생들을 제외하고, 생업으로 이 일을 하려는 사람중엔 더더욱이요.
문제는 한가지 더 있습니다. 몸과 정신이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어떤 사회적 / 개인적 요인에 의해 성장과정에 있어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교육사회와 가정의 무관심이나 폭력, 방치, 가난, 혹은 개인적 일탈 등 아주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겁니다. 사실 스스로 건강함을 자신하는 사람들조차 이런 성장과정에서 한두가지의 아주 예민하고 비정상적인 감정이나 트리거는 갖게 마련이죠. 그것은 폭력성일수도 있고 우울함일수도 있고 이상성욕일수도 있고 폭식이나 나태일수도 있고 과소비나 도박, 중독일수도 있습니다. 어느쪽이든 사람마다 대부분 약간의 비정상성은 갖고있다는 거죠.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보다도 더욱 더 물질적 빚 만큼이나 몸과 정신이 좋은 상태이기 어렵습니다. 정확히는, 가난한 사람 대부분은 이미 몸과 정신 역시 어느정도는 가난에 의해 '낡아'진 상태라고 보는게 타당합니다. 유머게시판의 '몸 정신 말짱한데 왜 가난하냐'는 명제가 처음부터 틀린 이유겠죠. 지금처럼 빠른 변화와 고도화된 사회에서는 역설적으로, 몸 정신이 말짱해도 경쟁에서 이기기 쉽지 않은데 멀쩡한 몸 정신마저 낡게 하는것이야 말로 가난의 무서움이니까요.
게다가 고용주의 입장에서는, 대부분의 영세 사업자들이 그러하겠지만, 30대를 훌쩍 넘은 사람들을 잘 쓰지 않습니다. 30대 중반을 넘어가기 시작하면, 이전의 이력을 '고작 편의점이라도' 한번쯤 확인하기 마련입니다. 누군가에겐 고작 편의점이지만 업주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성실하고 똑똑한 사람을 뽑고 싶으니까요. 사실 편의점 일이라는게 생각보다 복잡한 부분도 있습니다. 최신 전산시스템의 다양한 기능들을 활용해야하고, 주, 월마다 바뀌는 행사를 숙지해야하고, 상품의 위치와 유통기한을 살펴야하고, 다양한 결제수단을 고려해야해요. 이런것들은 교육수준이 낮거나 나이든 분들이 습득하기 좀 어려워 하는 부분도 많습니다. 그러니 같은 가격이면 가장 리뷰가 좋고 제품설명과 보증이 확실한, 디자인이 예쁜 상품을 고르는 것처럼 편의점 직원 마저 어느정도의 기준을 갖고 사람을 뽑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30대 중반을 넘어가기 전에 가난에 의해 이 일 저 일 이것저것 하다가 이렇다 할 숙련도도, 경력도 얻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은 개인의 성실함 문제일수도있고 환경의 문제일수도 있지만) 이런 저임금 시장에서조차 굉장히 빠르게 도태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가게 되는 곳은 보험판매원, 경비용역, 주차용역, 미화용역, 건설용역, 주방보조, 방문판매원 등입니다. 늘 사람이 필요하고 항상 저임금일자리를 제공하는 곳들이죠. 문제는 이런 직업일수록 육체적 정신적 노화를 가속화시키고 건강을 빠르게 해친다는 점입니다. 숙련과 동시에 몸은 깎여나가기 시작하고, 임금 상승폭은 무척 낮습니다. 심지어 고용 불안정성은 높고, 미래는 아무리 아끼고 저축을 해도 깜깜합니다. 일자리가 없어지지 않는 것, 그리고 내 몸이 어떤 고통이 있더라도 버텨주는 것. 이러한 모순된 막연한 기대속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허나 30대 후반에서 40대를 넘어갔는데 변변찮은 기술도 이력도 없다면 이런 직종조차 구하기가 어려워집니다. 행여나 그동안 가난에 의해 몸이 상했다면, 정말로 '법이 보호하지 않는' 일자리조차 감지덕지하게 됩니다. 이마저도 모자라 잔고와 빚에 허덕이기 시작하면, 지엄한 법률은 종이쪼가리만도 못합니다. 그 때부터는 빈곤이 빈곤을 불러온다는 말과, 삶이 죽음보다 무겁다는 것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세상이 늘 불운과 불행으로만 가득하진 않을겁니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중 하나로, 저런 저임금 노동조차도 운과 성실성이 바탕이되면 어느정도의 생활수준을 구사할 수 있게 만들어주지요. 위에서 언급한 직업군에 들어서서 꾸준히 일을 하고, 어찌어찌 가난한 사람끼리라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아등바등 열심히 살면 월세가 전세되기도 하고, 반지하가 1층으로, 2층으로 가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될 때 즈음, 그 동안 전혀 호사와 여유를 부리지 못한 사람들이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면, 단 한 순간에 그동안 쌓아온 빈곤과의 벽이 허물어집니다. 빈곤은 마치 얇은 문풍지로 바람을 막아왔던 것처럼 세차게 들이치기 시작합니다. 사람을 낡게 하지 않는 노동이 없다지만, 특히나 저임금 고위험일자리들은 더 빠른 속도로 사람을 마모시키고, 그렇게 빠르게 낡아가는 사람들을 빈곤은 마구 잡아먹습니다.
이런 사회의 모습을 보며 어떤 사람들은 그럼 공무원 시험이라도 죽어라 했어야지, 라거나. 경력을 쌓았어야지. 뭘 배웠어야지. 라고 쉽게 말합니다. 그러나 제가 최저임금 일자리를 도는 20대부터 60대 사이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낀 것은, 무엇을 배우고, 익히고, 노력하는것 조차 개인의 재능과 사회적 요건 없이는 발휘하기 무척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명백한 희망과 노력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이 있는가, 당장 가난과 노동에 의해 스스로의 선택을 강요당하지 않는가, 날로 피곤해지고 힘들어지는 신체를 의지로 끌어당길 수 있는가. 이 과정 모두에서 그 개인의 열정, 의지, 노력등으로 이야기되는 정신적 요소들은 그가 가진 '배우고 익히는 데' 필요한 재능과 신체적 건강, 적절한 영양등이 받쳐주는지에 따라 결과가 극적으로 달라집니다. 같은 시간을 살고 비슷하게 나이를 먹어도 어떤이에게는 판타지 소설조차 잘 이해가 안가서 이세계 깽판물 아니면 안본다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은 원어로 된 논문을 손쉽게 읽어냅니다. 그 극단적 차이에서 사람의 지능이나 노력으로 행하는 행동들이 그 사람의 성장과정과 환경속에서 대부분 만들어져 온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가난했던 사람중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무언가는 '타고 나' 있어야 합니다. 조금은 머리가 영민하다거나, 조금은 끈기가 있다거나, 조금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라거나.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가난은 아주 빠르게 풍화시킬 수 있습니다. 게다가 풍화의 속도만큼이나 우리는 빠르게 나이를 먹지요. 이 모든 노력이 무용해지는 나이가 정말 금세 찾아옵니다.
제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에서 타인의 빈곤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절대적으로 빈곤하다는 것을 모른다기 보다, 우리가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시도하고 유지하는 당연한 것들이 남들에게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정말 상상 이상으로 사람간에 많은 능력 차이를 보입니다. 행동능력, 지능, 판단력, 외모, 체력.. 가난하지 않다는 것은 이 부족한 것들을 부담없이 채워나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것을 타고나더라도 채우긴 커녕 있는 것을 깎아 써서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마저도 빠르게 대처하지 않으면, 30대, 40대가 되어서는 정말 돌이키기 어려운 상황으로 추락합니다. 아무도, 당신에게 일을 시키고 싶어하지 않아한다면, 빈곤을 벗어날 시도조차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저는 이게 어떻게 해소되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최저임금의 상승을 찬성하지만(돈주기 개빡셉니다 저는 시급으로 치면 5천원쯤 벌겁니다) 이 혜택을 많이 받는 사람들은 오히려 현재 정말로 노동시장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다수인건 아닐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정말로 기초소득같은걸 주는게 절대빈곤에서 구제할 방법일수도 있지요. 노동시장에서는 빈곤에 오래 노출된 사람들이 더욱 더 빈곤해지기 딱 좋습니다. 그래서 '몸과 정신이 멀쩡한데' 가난한 사람이 있겠냐, 애슐리 못가는게 말이 되냐는 말은 전제부터 틀렸습니다. 가난한테 몸과 정신이 온전히 말짱하긴 어렵습니다. 긴 시간 그렇게 유지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애슐리를 한 번 가자는 마음가짐을 먹기 전에, 몸과 정신이 깎여나가거나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거나. 정말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삶을 '버티고'있습니다. 저 역시, 얇은 문풍지로 막아놓은 빈곤의 바람을 앞에두고 문풍지가 찢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필사적일 뿐입니다.
이 명절에도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가족들 얼굴을 못 보고, 인스턴트 음식을 먹으며 일하는 노동자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 명절에, 그 일자리조차 없어서 한 숨을 안주삼아 소주 한 잔에 의탁하는 사람들은 더 많습니다. 그 소주 한 병을 살 돈이 아까워서, 늙은 몸뚱이를 방바닥에 눕힌 채 홀로 추석이 아닌 9월 13일을 보내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한국의 빈부격차는 세계에서 무척 높은 수준이며, 한국의 청년실업률 역시 상당히 높고, 한국의 노인빈곤률 역시 세계 최고수준이며, 자살인구 역시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노력할 수 있는 사람이란, 우리가 바라보는 것 보다 훨씬 적을지도 모릅니다.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아마 노력할 수 있는 사람만이 우리 주변에서 '사회적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이미 도태되어 가는 사람들은, 도시의 변두리로 숨고, 소리도, 냄새도 지워집니다. 그 지워져 가는 곳에도 사람이 있습니다.
출처 : http://gyuhang.net/entry/개새끼들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하자 아버지가 분주해졌다. 하루는 아버지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거 OO본부 행정병으로 가는 건데, 그런 데 가면 책도 볼 수 있고 좋지 않으냐.” 직업군인이던 아버지는 당신 아들 됨됨이와 당신이 삼십 년 동안 체험한 군대가 빚어낼 부조화에 대해 오래 전부터 심각하게 걱정해온 터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모병 쪽에 있던 아버지 동기가 약간의 배려를 한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청을 물리칠 수 없었고 그날 밤 종이를 채우기로 했다. 김-규-항-6-2-1-1-2... 워낙에 악필이라 글자 하나에 1분 정도를 들여 ‘그려나가던’ 나는 이내 짜증에 휩싸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나 때문에 원래 그 부대 운이 닿았던 한 녀석이 전방에 가서 뺑이 칠 거라는 데 생각이 이르자 도저히 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종이를 찢어 휴지통에 던졌다. “아버지 저 그냥 갈게요. 꼭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아버지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떨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입대 당일 나는 가족들을 대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친구 녀석들에게 입대 날짜를 알리지 않은 건 물론이었다. 혼자 기차를 타고 논산에 내려 머리를 깎고 훈련소에 들어섰다. 의연하고 의젓하게, 하여튼 갖은 폼은 다 잡으며 입대했건만 내 선택을 후회하게 되는 데는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67년 생부터 거슬러 시작한 나이 파악은 65년생에서 제일 많았고 63년생 땐 아무도 없었다. 파악을 마쳤다고 생각한 조교는 내무반을 나갔다. 조교가 다시 돌아온 것은 5분이 채 못 되어서였다. 다짜고짜 짠밥통을 걷어찬 조교가 소리쳤다. “손 안 든 새끼 나와.” 더럭 겁이 난 나는 앞으로 튀어나갔다. “너 이 새끼 왜 손 안 들었어.” “62년생입니다.” 와 하고 폭소가 터졌다. 머쓱해진 조교는 나가버렸지만 그 요란한 웃음소리는 내 머리통 속에 아득한 공명을 일으키며 후회와 절망감으로 변해갔다.
그 광경을 본 건 상병 때였다. 휴가 길에 나는 화곡동 국군통합병원에 들렀다. 중대 이병 하나가 트럭 바퀴에 머리통이 끼는 사고를 당해 입원해 있었다. 귤봉지를 들고 정형외과 병동을 찾았을 때, 내가 찾은 녀석 건너편 침상에 유난히 체구가 큰 사병 하나가 눈을 감은 채 울고 있었다. 침상 옆엔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아들 손에 고개를 묻은 채 하염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사병의 몸엔 담요가 덮여 있었지만 나는 이내 그의 다리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모자의 끝 모를 절망과 비통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군대 가서 사람된다느니 사내다워진다느니 하는 얘기는 그저 농담이다. 사람이 되는 게 권위에 무작정 복종하는 일이고 사내다워지는 게 힘없는 사람에게 일수록 불량스러워지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군대도 군대 나름이겠지만 이 나라의 평범한 아들들이 가는 군대란 언제나 고되고 삭막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며 아차 하면 병신 되거나 죽는 곳이며 도무지 배울 게 없는 곳이다. 돈을 먹여서 군대를 빠지는 일이 끔찍한 죄인 건 단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 하지 않거나 남 하는 고생을 피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대신 군대에 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마님 아들 빠진 자리를 머슴 아들이 대신하게 하는 것이다. 이른바 시민사회에서 말이다. 군대란 안 갈수록 이익인 곳임에 분명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한국의 신체 건강한 청년이라면 그저 눈 딱 감고 3년 썩어줄 필요가 있다. 어쩔 것인가. 후진 나라에 태어난 것도 죄라면 죄 아닌가.
제 자식 대신 남의 자식 군대 보내는 더러운 아버지들, 그리고 이제 스물 몇 살의 나이에 그런 악취 나는 거래에 제 몸을 내 맞긴 음탕한 아들들. 그들에게 성질 나쁜 아들 군대 보내고 3년을 잠 못 이룬 내 아버지의 한숨과 다리 잘린 아들 곁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울던 한 어머니의 눈물을 담아 꼭 들려줄 말이 있다. 개새끼들. | 씨네21 1999년_5월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6021750365&code=980201
2002한·일월드컵 이탈리아와의 16강전 때의 이야기다.
전반전이 끝나고 선수들이 라커룸으로 들어왔다. 안정환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페널티킥을 실축했고, 한국은 0-1로 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안정환에게 페널티킥 실축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경기가 끝날 때까지 교체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 알다시피 안정환은 극적인 연장 골든골로 한국을 8강에 끌어올리며 히딩크 감독의 믿음에 보답했다.
감독이란 이런 것이다. 뛰어난 감독은 전술·전략을 따지기 이전에 선수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라운드에서 100% 이상의 능력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은퇴한 최진철은 “히딩크 감독은 선수들의 심리를 파악하고 활용하는 데 탁월했다”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허정무 감독이 요르단과 2-2 무승부를 이룬 뒤 “징계 중인 골키퍼 이운재의 사면을 협회에 건의해보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것은 ‘긁어 부스럼’이었다.
이운재는 지난해 7월 아시안컵 대회 도중 숙소를 무단 이탈해 술을 마신 사실이 밝혀져 그해 11월2일 대표선수 자격정지 1년의 중징계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이운재는 올해 프로 16경기에서 9골만 내주며 수원의 무패행진을 이끌고 있다. 감독이 최고의 선수를 국가대표로 불러들이고 싶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이운재는 11월이나 돼야 대표팀 합류가 가능하다. 허 감독이 기대하는 조기 사면도 징계 기한의 3분의 2가 지나는 7월이 돼야 대상이 될 수 있다.
결국 지금 당장은 이운재의 사면도, 대표팀 발탁도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될 일도 아닌 희망사항을 말하면서 허 감독은 속마음만 들켜버렸다. 김용대나 정성룡, 김영광 등 세 명의 골키퍼를 믿지 못하면서 마지못해 데리고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린 것이다. 허 감독은 이들이 받을 마음의 상처나 자존심의 훼손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하다.
어찌됐든 앞으로 1주일 간격으로 이어지는 요르단과 투르크메니스탄의 원정 2연전과 북한과의 홈경기엔 좋든 싫든 이들을 쓸 수밖에 없는 데도 말이다.
감독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과연 온몸을 던질 수 있을까.
이운재 사면을 운운하기 전에 선수들 마음부터 살펴야 할 때다.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08115
중대장들을 해방시켜주자
뻔한 지시의 홍수 끝내야한다
표명열(pyo3393) 기자 (http://www.ohmynews.com)
하급간부의 자율성 보장
군부대가 전투 혹은 훈련 중에 지켜야 하는 준칙을 제시한 야전 교범에는 "지휘관은 부대의 승패에 관해 모든 책임을 진다"라고 씌어 있다. 부분적인 책임이 아니라 전적으로 총체적인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즉 무한책임을 진다는 의미다.
대대장급 이상 지휘관은 부하들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큰 소리 질러 지휘하지 않는다. 하급 지휘관에 대한 지시 혹은 명령을 통해서 지휘한다. 무한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지휘관의 지시는 가능한 한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중대장→대대장→연대장→사단장→군단장→군사령관→참모총장은 모두가 무한책임을 지는 자세로 명령지시하고 있다. 이는 부모가 자식에게 타이르는 것과는 다르다. 완전히 강제성을 지니고 있다.
중대장은 마치 절대로 실수를 묵인하거나 용서할 줄 모르는 6단계 위의 엄격한 시어머니와 시할머니들을 모시고 살고 있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그런데 이 웃분들은 시할머니들과 달라 위로 갈수록 더 영향력이 세다.
시어머니의 참견이 없어서 힘든 며느리는 없는 것처럼 상급부대의 지시가 부족해서 힘든 중대는 없다. 윗사람의 지시가 없어도 잘할 수 있다면 사실 지시란 불필요한 간섭에 불과하다.
통상 상급 지휘관의 지시는 하급지휘관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고려하지 않고 현장의 여건 상태가 어떠한지에 관계없이 무작정 하달된다. 상급부대이기 때문에 관성적으로 지시하며 위 부대로부터 지시받았기 때문에 다시 전달 지시하는 것이 보통이어서 중대장은 지시의 홍수 속에 파묻혀 그야말로 정신 차릴 수 없이 바쁘게 허둥거린다.
상급부대의 끊임없는 지시는 예하 부대의 융통성과 자율성을 심각하게 침해한다. 하급부대 지휘관들은 사고가 나면 직접 책임을 져야 하는 중압감 속에서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지시를 처리 이행하기도 바쁜데 자신도 지시를 만들어 내려주어야 한다. 이런 행위를 충성심과 애국심 또는 직무에 대한 사명감이라고들 말하니 어쩔 수 없다. 그냥 지시의 포로가 되어 늘 지쳐 있는 것이다.
예하 부대에 하달되고 있는 지시의 내용을 살펴 보면 대부분 부대관리에 관련된 것들로서 '사고가 없도록 하라!'가 가장 많다. 총기 및 탄약관리방법, 사고사례 전파 등 빤한 내용이지만 그 양이 실로 엄청나다. 기타 작전과 훈련에 관련된 것들도 늘 되풀이되어온 내용들로서 새로운 지식이나 정보의 전파가 아니라 지금까지 수없이 반복되어온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범이요! 범!"의 우화처럼, 이미 비에 젖어 있는 사람은 소나기가 온다고 뛰지 않는 것처럼 중대장들은 하도 많이 받고 들어서 거의 무감각한 상태에서 수용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사고가 발생하면 직접적으로 가장 큰 책임을 지는 사람은 하급간부 자신들이기 때문에 그런 지시가 없다고 하더라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중대장이 사고예방에 관한 지시를 이행했다고 해서 사고가 발생하게 되면 이에 대한 책임이 면제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지시란 하급자의 권한은 박탈하면서 책임은 더 무겁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이미 사고 내지 말라는 지시를 수없이 받은 자는 사고 책임에 더해서 지시를 이행하지 못한 책임, 심한 경우 "예! 문제없습니다"라 했던 허위보고의 책임까지 져야 할 입장이 되는 것이다.
특히 문제인 것은 사고가 났을 때 상급자의 입장에서는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하 부대에 대해 책임추궁을 위한 근거확보가 되어 '권한은 위임하되 책임은 위임할 수 없다'는 지휘통솔의 원칙에 크게 위배된다는 점이다.
조직원들이 윗사람으로부터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은 '널 믿는다!'이며 가장 싫어하는 말은 '시키는 대로 해!'라는 불신의 태도다. 군에서 하달되는 지시 공문은 대부분 '시키는 대로 해!'보다 훨씬 강압적이며 공격적이다.
나의 졸저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를 내놓았을 때 내용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한다는 어느 육사출신 대대장으로부터 하급간부들의 자율성과 도전의식을 잠재우고 자신감을 훼손하고 있는 군대문화를 개혁하는 데도 관심을 둬달라는 부탁을 하며 위와 같은 하급부대의 딱한 현실을 전자우편으로 보내왔었다. 40여 년 전 내가 중대장할 때보다 더 숨 막히는 분위기임을 느꼈다.
그는 임기 내내, 대대장 스스로 판단하여 소신껏 진행하라는 얘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중대장이나 소대장, 부 사관들은 말해 무엇하랴!
상급부대의 간섭만 없으면 오히려 부대가 더욱 진취적으로 발전할 수 있고 병영생활을 보다 명랑하고 활력 있게 만들 수 있는 부분이 참으로 많다. 그래서 초급간부들은 가능한 한 상급부대의 간섭이 적게 미치는 부대에서 근무하기를 선호한다.
하급부대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지휘 서신이나 지휘관의 강력한 강조만으로는 불가능할 정도로 상급부대 위주의 문화가 관습화 구조화되어 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하급부대 지휘관을 괴롭힐 뿐인 사고방지 강조 등 일체의 지시공문과 전문 등은 철폐해야 한다.
상급부대 참모들이 지휘관에게 보고하기 위해 지도방문이라는 이름으로 시행하고 있는 예하 부대 방문도 정상적 조직문화가 정착될 때까지 당분간 일절 금지해야 한다. 특히 각 부대별로 비교를 하여 경쟁을 유발함으로써 예하 부대를 숨 막히게 하는 방법은 중단해야 한다.
장개석 군대가 광대한 대륙을 빼앗기고 조그마한 섬 대만으로 쫓겨 온 후, 뼈를 깎는 자기반성의 패인분석을 하여 얻은 결론의 핵심내용 중 하나가 바로 상급부대의 군림과 간섭으로 인한 하급부대의 자율성 상실 및 사기 저하였다. 그리하여 상급부대란 하급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개념을 확고히 정립하여 모든 예하 부대 방문을 철폐하고 고급간부 능력 판단의 주요 기준을 하급부대에 대한 실질적인 자율성 보장과 헌신적 지원 실적 여부에 두는 등의 대개혁을 단행하여 바람직한 군대문화 정착에 성공을 거둔 바 있다.
이리하여 대만 군대에서는 계급이 높아질수록 겸손하고 아래 사람에 대한 애정과 봉사의 정신이 뛰어난 분이라는 의식이 일반화되어 있다.
우리 군의 군대문화와 의식개혁 특히 간부훈육개혁 시급하다.